소설로 만나는 선지식 ‘탄허’의 진면목

탄허 스님 삶·사상 ‘이야기’로 엮어
어린 시절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화·설법·대담·지인 증언들 토대로
불교 몰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어
전작과 또 다른 불교적 색채 담아

 

“1983년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 일흔하나, 법랍 마흔아홉의 한 노승이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탄허는 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유시를 앞두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영화 ‘관상’의 원작과 〈십우도〉 등으로 알려진 작가 백금남이 신작 소설 〈천하의 지식인이여, 내게 와서 물으라〉(이하, 천하의 지식인이여)를 출간했다.

〈천하의 지식인이여〉는 금세기 최고의 학승이자 선승으로 추앙받는 탄허 스님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은 전기적 소설이다. 탄허 스님은 10만 장이 넘는 번역 원고를 남겼음에도 자신의 사적인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작가는 탄허 스님의 어린 시절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히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가의 모든 경서를 섭렵하고 노자와 장자까지 두루 통달했음에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의혹을 풀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 유생의 모습, 갈등과 방황을 끝내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의 의식적 변화 과정 등은 백금남 작가의 남다른 노력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백 작가는 이러한 어려움을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구체적인 이야기로 엮어냈다. 출가 전인 김금택이 유가와 도가의 교리만으로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을 그의 스승이었던 이극종이나 당대의 선지식들과의 대담을 통해 구체화하는가 하면, 불가로의 귀의에 있어서는 인연법에 기인한 예지몽을 통해 나병환자들의 피고름을 손수 닦아내며 돌보았던 경허 선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불가의 스승인 한암 스님의 출가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젊은 출가자의 갈등을 우회적으로 풀어냈다.

이처럼 〈천하의 지식인이여〉는 설명이나 주장이 아닌 ‘이야기’로 탄허 스님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소설이다. 이 같은 작업은 작가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백금남 작가는 〈십우도〉 〈칼의 어록〉 〈붓다평전〉 등 전작에서 이미 자신의 깊은 불교적 정서와 성향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또 다른 무늬의 불가적 색채로 ‘탄허’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이번 〈천하의 지식인이여〉는 굳이 불교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식의 근간이 되어왔음에도 항상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구체적이고 가깝게 다가온다.

탄허 스님은 독립운동가인 율제 김홍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학의 전 과정을 공부했다. 김제 제일의 천재로 통했던 그의 학문적 성취는 놀라울 만큼 빠르고 깊었다. 그러나 유학의 모든 경전을 독파하고도 삶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22세의 나이에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한다. 입산 후 탄허 스님은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용맹정진을 시작했고, 수행 2년 만에 상원사 승려연합수련소에서 〈금강경〉 〈기신론〉 〈범망경〉 등을 강의하면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고암, 탄옹 스님의 청에 의해 〈화엄경〉과 〈화엄론〉을 강의하는 등 학승으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당시 탄허 스님은 자신을 찾아온 수강자들에게 “천하의 지식인이여, 내게 물으시오.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어찌 명전천추(名傳千秋)할 수 있겠소. 모르면 묻고, 묻지 않는다면 다 안 것으로 알고 내가 물어보리라”고 했다.

탄허 스님은 학승뿐만 아니라 선승으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스님의 강의가 소문을 타면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승들도 그의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최고의 선승으로 불리던 전강 화상은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들은 후 후학인 탄허 스님의 절을 맞절로 받았다.

이처럼 탄허 스님은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고 선(禪)과 교(敎)를 겸비한 석학이자 선지식이었다. 그런 탄허 스님은 종종 주위를 놀라게 하는 예지력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종명일을 예언한 일은 승가는 물론 세간에도 잘 알려진 일화다. 모두에 언급한 소설 속의 이야기가 실존의 그 이야기다.

시주의 은혜를 무겁게 여겼던 스님은 59세부터 돌을 갈아 죽을 쑤어 먹으며 수행했다.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님은 암이라는 큰 병을 얻게 된다. 석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에 제자들은 안타까워했지만 스님은 제자들에게 병이 사람을 잡아갈 수 없다며, 자신의 종명일을 모두에 언급했던 6년 뒤인 음력 4월 24일 유시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6년을 더 살고 예언일에 원적에 들었다.

탄허 스님은 자신의 종명일 말고도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이기붕의 죽음, 박정희 前 대통령의 총기 사망 등 세간의 큰 사건들을 예언한 바 있다.

백금남 작가가 5년 동안 집필한 소설 〈천하의 지식인이여〉는 탄허 스님이 남긴 일화, 설법, 대담, 지인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유추해 완성됐다. 따라서 글의 서술에 작가의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시간의 맥을 짚어가며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소설은 지금까지 대부분 ‘학승’으로 조명되었던 탄허 스님을 여러 면에서 좀 더 깊이 조명했다고 할 수 있다. 화엄학의 종장으로서 세상의 앞날과 자신의 종명일까지 내다본 탄허 스님의 치열했던 생애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