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 년을 살아낸 한 사람이 묻습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오는가?"
625전쟁 참전, 미국 UC버클리 유학, 국내 최초 환경공학과 창설 - 그러면서도 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명상을 해온 사람. 저자 김동민은 그 방대한 삶의 무게를 지닌 채, 90세를 넘긴 시점에 마침내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닙니다.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그리고 삶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한 인간이 온 생애를 걸어 찾아낸 답을 담은 책입니다.
제1부 '지나온 삶' 은 1956년 가을 가난한 결혼식 날부터 일제 강점기 소년의 고난, 전쟁, 유학, 교수로서의 전성기, 그리고 반려자와의 마지막 이별까지 -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생생한 기록입니다.
제2부 '진리를 찾아서' 는 그 삶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 마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 불교·힌두 영성과 서양 철학을 아우르며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필 문체로 풀어냅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저자가 자신의 육신에게 쓴 시 '몸과의 이별'이 실려 있습니다. 90여 년을 다 산 뒤 - 몸과 작별하면서 남긴 말.
이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삶이 무거워질 때,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90년을 살아낸 사람이 건네는 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 우리 자신의 삶을 보게 해주는 거울입니다.
저자 : 김동민
서기 1931년 경기도 장단군진서면어룡리(長端郡津西面漁龍里)의 널문이다리(板門店) 옆 마을에서 태어났다. 개성(開城)에서 초등학교와 6년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군산(群山)에 있던 국립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했다(1950학번). 6·25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단기 훈련을 받은 후 소위 및 소대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후 제대가 늦어지는 탓에, 방향을 바꿔 동아대학교에서 야간 학생 신분으로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로 환경공학을 전공하면서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석사학위를, 네덜란드 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에서 Diploma 학위를, 그리고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에 교수직을 시작했고, 1996년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환경공학 제1세대로서, 재직 중 나라 최초의 환경공학과와 대한환경공학회를 창설했고(초대 및 제2대회장), 국가와 서울시의 132 133환경기술 분야 제도 마련을 도왔고, 초기의 수질오염방지시설 설계 및 설계자문을 하는 등, 나라 안에 환경공학 분야의 학문과 기술과 제도의 초석을 놓고 다지는 일을 수행했다.(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음)그런 일과는 무관하게 소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계율적 삶을 살았고, 중년 때까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늘 혼자 명상을 했다. 퇴직 후로는 서울의 큰 사찰 선원에 다니면서, 도반들과 함께 좌선(坐禪)을 했다. 불교에는 중년이던 1986년에 입문했다.
- 개정판을 내면서
책을 내면서
인생-그 무상과 고와 소멸
제1부 지나온 삶내 생애 최고의 날들
불운했던 소년 시절
옛 영화 〈망루의 결사대〉를 떠올리며
고학 시절-연백평야에서
유령이 된 선친과의 만남
내가 행한 건강 관리
켈리와의 만남과 그녀의 암 회생
고 김교수 대위 및 제6중대원들을 추모하면서
고향을 생각하다
나의 좌우명
2부 진리를 찾아서세 분 성현의 말씀
무너지는 지구촌의 질서
무상-상황변화 이야기
외로운 현대인들
인생은 왜 고해인가
마음 이야기
제자의 죽음
퇴직 후에 내가 한 일, 명상
삶의 의미
견성-참나로 돌아가는 바른 길
몸과의 이별
책 속으로
그 당시는 나라도 백성도 가난했다. 6·25전쟁 휴전 3년 뒤였는데, 총탄 맞은 폐허가 시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주택과 상가 건물의 태반이 허름한 판자 구조물이었고, 국민 과반수가 보릿고개를 제대로 못 넘겨 굶주림의 한계 상황으로 내몰렸고, 전국의 산은 오지까지도 민둥산이었고, 전기든 수도든 끊길 때가 더 많았고, 국적 여객기가 없어 대통령이 해외 나들이를 제대로 못 했던 시절이었다. 육군 대위였던 내 월급이 약 1만 환이었는데, 이것저것 떼고 받는 실 수령액은 9천 환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1천 환은 1961년에 1백 원으로 평가절하됐다.
_〈내 생애 최고의 날들〉
아무튼 벅찼다. 세계 6위권에 드는 명문 대학교, 위생공학은 그 안에서 세계 1위, 노벨과학상 받은 현직교수 다섯 분, 울창한 삼나무(redwood)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100년도 더 된 고색(古色)의 캠퍼스. 이런 대학교에서 내가 석사학위를 받다니…. 그것도, 6·25전쟁 탓에 빈 졸업장을 쥐고 간 1950학번생이…. 주중에는 세 시간만 자면서 그리고 젖 먹은 힘까지 짜내며 버틴, 지나간 그 간난(艱難)의 1년간…. 비록 축하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고 박사학위도 아니었지만, 참으로 벅찬 감격이었다.
_〈내 생애 최고의 날들〉
그렇지만, 지나간 그 시절은 사실 나만이 그랬던 시기는 아니었다. 온 겨레가 함께 도탄(塗炭)에 빠졌던 임진왜란 후 최악의 민족 수난기였고, 온 겨레가 함께 그 늪을 헤치고 나라 다시 만들기와 잘살기의 시동을 건 민족 굴기(崛起)의 시기였다. 일제의 억압과 연이은 전쟁 수행, 광복과 함께 맞은 국토 분단과 대혼란, 동족상잔의 6·25전쟁, 폐허를 딛고 일구기 시작한 국가재건과 산업화 등으로 상징되는 1941~1965년의 기간은, 그런 시기였다. 다만 내 경우는, 그러한 시대 상황과 일찍부터 내몰린 홀로서기의 운명이 맞물려, 고통이 상승(相乘)됐을 뿐이다.
_〈내 생애 최고의 날들〉
낮에는 강의와 행정 등의 일 그리고 밤에는 강의 준비와 여타의 일들…. 허구한 날 밤을 지새우며 그리고 봄가을로 보약을 먹어가며 일을 했다. 교과 과정 결정, 연구실과 강의실 실험실 기자재 등의 확보, 교수 초빙을 위한 국내외 접촉과 청탁으로 압력으로 들어오려는 무자격 교수 후보 저지하기, 우수한 신입생 모집, 외면할 수 없는 환경공학 분야의 대정부(對政府) 대사회(對社會) 봉사와 각종 행사 참여…. 몸이 둘이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고 고달팠다. 그 학과는, 다행히 그 후 들어온 그리고 실력이 나보다 훨씬 나은 후배 교수분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다.
_〈내 생애 최고의 날들〉
그런 운과 함께 그리고 송구스럽지만, 내게는 사명감이 있었다. 일제 식민 통치와 연이은 전쟁과 광복 후 혼란과 동족상잔의 6·25전쟁과 빈곤, 굴욕, 무력(無力)…, 그런 상황 속에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하면서 형성된 나름의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전우들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느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국립묘지와 옛 격전지를 돌며 전사한 동기생 및 전우들의 넋을 위로하는 짓을 지금도 하고 있다. 쇠잔한 생존 노병들과 함께….) 다시 한마디로 그리고 신념적으로, 교수직 수행은 김동민에게 6·25전쟁 참여 연장이었던 것이다. 실패해서는 아니 되는 그런 것이었다.
_〈내 생애 최고의 날들〉
그 무렵 네 식구가 먹은 끼니는 간혹 입쌀이 섞인 보리밥, 수제비, 강냉이, 감자, 술찌끼, 비지 등이었는데, 늘 양(量)에 차지 않았고 점심은 굶는 날이 많았다. 그것이, 생필품 부족에 더하여 폐결핵, 이질, 학질 등의 질병과 회충(蛔蟲) 등의 체내 기생충과 체외 기생충인 이 빈대 벼룩 및 옴에 시달리며 지내는 고통을 서민들이 감내하던 시절, 우리 식구들이 연명하던 모습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아프리카 난민촌 주민들만도 못하게 보일 수 있는, 그 무렵의 하층민이 생존하던 모습이었다.
_〈불운했던 소년 시절〉
나는, 사서 고생한 측면이 있지만, 어떻게든 다니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싶었다. 하여 다시 행상과 가정교사, 신문 팔기, 최전방에 가서 참호 파기 등의 일을 했지만, 가정교사일 말고는 도둑질하듯 또래들 모르게 했다. 들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좀 다르지만, 남들이 교실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을 때에도 슬그머니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다. 영어사전 없이 영어 공부를 하고, 갈아입을 것이 없어 구멍 난 바지를 가려가며 입고, 행상 경비를 아끼려 무임승차 했다가 철도경찰에게 들켜 늘씬하게 맞기도 했는데, 닫은 눈에서 별빛이 번득대도록 볼기에 곤장을 맞은 그때는 스스로의 처지가 그지없이 한심스러웠다. 자존심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꿈 많던 소년 시절에 겪은 그 아픔….
_〈불운했던 소년 시절〉
여담이지만, 철도경찰에게 맞은 그 무렵을 계기로 나는, 자살 충동을 억누르며 ‘죽기 살기’로 살았다. 하늘 아래에 기댈 곳이 없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돈 추구하는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비정(非情)한 속성…. 그것을 못 가진 하층민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나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신념이었다. 하여 부동산투기로 돈 버는 짓이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웠던 1960~1970년대에도 선점(先占)한 그것을 되팔면서 차액 챙기는 일,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일 등을 아니했다.
_〈불운했던 소년 시절〉
그러던 중, 1945년 중학교 2학년생이던 해의 8월 15일, 친구 하나가 누워 있던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 했다. 고된 근로봉사와 가난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 지내던 내게 와 알려준 엄청난 뉴스였는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 되물었다. ‘해방’이 뭐냐고…. 그 정도로 의식화돼 있었는데, 제대로 설명 못 한 그 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체성을 되찾은 한국인 소년이 될 수 있었다. 변화된 내 나라 환경에 적응하고, 처음 보는 배달민족 역사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하면서….
_〈옛 영화 〈망루의 결사대〉를 떠올리며〉
선친께서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개성부청(開城府廳)의 말단 직원이셨다. 그랬던 분이, 돈벌이를 위해 직장을 사퇴하고 상인으로 변신을 시도하면서, 중국으로 떠나셨다. 몇 분 프로(pro) 개성상인들과 함께…. 그분들과 끝까지 어울리면서 적시에 돌아오셔야 했는데, 독자적 사업 기회를 찾아서 험한 오지에 들어가, 홀로 장기 체류하며 때를 놓친 것이 고만 화근(禍根)이 됐던 것이다.
_〈옛 영화 〈망루의 결사대〉를 떠올리며〉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체력은 꼴찌 수준이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거북 등 모습의 한 작은 녀석이 내 턱에 일격을 가했는데, 나는 아찔하면서 쓰러질 뻔했다. 여럿이 지켜보는 곳에서 나를 쳐다보며 그랬는데, 마치 저보다도 못한 자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_〈내가 행한 건강 관리〉
1982년 늦은 봄의 어느 날, 그녀는 수술을 받았다. 주치의는 경악했다. 수술대 위에 누운 그녀의 두개골 그 부분을 열어본즉슨, 뇌종양이 이미 나아 있었다. 콩알보다 작은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암 덩어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벙벙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실인즉, 나도 경악했다. 주치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소름이 끼치도록….)
_〈켈리와의 만남과 그녀의 암 회생〉
우리에게는 자부심이 있다. 비록 알아주는 이 없는 희생이었지만, 3년 1개월간의 6·25전쟁 기간 동안, 나라의 누란(累卵) 위기를 몸으로 막았다는 그런 자부심…. 전쟁 발발 전까지 대한민국 육군은 4,000여 명의 장교와 껍데기뿐인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발발 직후 초급 장교의 60%가 손실된 상태였다. 그런 궤멸 상태에서, 우리들 소모품 소대장이 양산(量産)된 것에 더하여 편제(編制)가 20개 사단 규모로 급팽창하는 바람에, 전쟁 전에 임관한 육사(陸士) 1~8기생들이 벼락 진급을 했다.
_〈고 김교수 대위 및 제6중대원들을 추모하면서〉
이렇듯 마음이란, 몸이 만든 기능일 뿐입니다. ‘나’가 되어 몸의 주인 및 길라잡이 역할을 하도록 그리고 다른 여러 개체들과 경쟁하면서 그와 그의 권속을 지키고 생존을 잇도록, 뇌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능…. 해부하여 샅샅이 뒤져봐도 찾을 길이 없는 그러면서 그 몸을 지키고 거느리도록 만들어진, 유일 소프트웨어(software)일 뿐입니다.
_〈마음 이야기〉
그러다가 어느새, 허공에 있으면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달리고 있는 버스의 지붕들, 그 일대의 교통 상황, 양쪽 인도, 인도에 접한 건물들…. 한참을 그러던 찰나에 ‘이 뭣고’라는 생각과 함께 몸 안으로 돌아왔는데, 버스는 어느덧 신설동 가까이까지 와 있었습니다.
_〈마음 이야기〉
나는, 퇴직하면서 전공 서적을 몽땅 버렸다. 그 많던 환경공학 및 관련 분야 서적들을 몽땅 버렸고, 남은 서적들도 꽤나 없앴다. 수십 년 동안 내 밥벌이를 지탱해 준 책들, 손때 묻은 책들…, 망설여지고 아쉽고 했지만 결단을 내렸다. 할 일이 있었고, 이 세상에 태어나 환경공학만 알고 죽기엔, 그 일 말고도 여생이 너무 아까워 그리했다.
_〈퇴직 후에 내가 한 일, 명상〉
선 수행의 목표는 마음을 지우는 것인데,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는 장치인 동시에 생각의 다발이고 분심은 강력한 생각인 동시에 마음의 일부입니다. 고로 분심을 일으키는 것은, 없애야할 그것을 더 강하게 하겠다는 그릇된 짓이 됩니다. 비유하건대, 도둑 잡는 장소에 한 패인 억센 도둑을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그런 발상이 됩니다. 최악의 분심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견성하기 전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 따위의 굳은 결심입니다.
_〈견성-참나로 돌아가는 바른 길〉
| 발행일 | 2026. 1.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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