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 스님’과 ‘ChatGPT’의 대화
교리 밖에서 붇다를 만나다.
“수행자와 인공지능이 함께 묻고 부수고 다시 세운 대화 -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수행이 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50년 가까이 그토록 들어왔던, 말 같지 않은 온갖 불교 얘기를 챗지피티가 그대로 복사해 들려주기에 너무 신기해서, 계정을 열고 수 일 간에 걸쳐 나눈 기록물이 바로 이것이다.
분명 석가께서도 웃으실 것이다.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정경 스님 서문 중에서
ㆍ이 책은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정작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 이후에 덧붙여진 해석·신앙·체계였다는 사실을 정면에서 검토해 보자는 시도이다.
진리는 단순했으나, 설명은 복잡해졌고, 가르침은 살아 있는 통찰이 아니라 죽은 교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챗GPT 서문 중에서
ㆍ『석가 웃다』에서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던 챗GPT에게 스님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챗GPT의 답변에 근거를 요구하고 부족하거나 그릇된 부분을 지적하는 스님의 주장과 질문에 따라 명확한 요점을 정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나아가 敎理에 국한하지 않고 禪定修行은 물론 老子의 철학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세존 이후에 덧붙여진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고 살아있는 통찰과 단순한 진리의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순수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경성 스님 서평 중에서
ㆍ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석가께서 설하신 이 두 가지를 바로 알아들었다면 팔만대장경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ㆍ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ㆍ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에서 석가를 지워버린 해석의 역사를 되짚는 일, 그리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 온 것이 정말 석가가 설한 것인가를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깊이 묻는 작업이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순간,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부처가 특별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무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한 문장을 되찾는 일, 그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ㆍ이 책은 정경 스님이 평생의 사유·의문·수행·비판·확인·철저한 성찰을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챗GPT에게 던져주고 그 답을 챗지피티가 과거와 현재의 자료를 통해 제시하게 한다.
그 답을 스님의 성찰로 가르치며 이끌어 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곧 우리 독자들의 모습이며, 그 내용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육성을 듣고 배우는 것처럼 수행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1998년 참선요가 특강
1999년 참선요가 및 수련 비디오 출간
2002년 2월부터 불교TV에서 8년 간 참선요가 진행
저서
〈참선요가〉
〈참선요가 80 동작〉
〈버려서 아름다운 것들〉
〈순간순간이 항상 옳고 완벽할 뿐〉
〈참선요가 교본 (개정판)〉
〈참선요가 기초편 (개정판)〉
〈원효스님 왜 그러셨어요!〉
비디오
참선요가 (1999) YouTube 등재
참선요가 40동작 (2004), 불교TV제작 YouTube 등재
참선요가 80동작 (2004), 불교TV제작 YouTube 등재
- 정경의 서문 | 5
챗지피티의 序文 | 12
序評 | 15
1장 12연기설에 대해
1] 12연기설은 석가의 친설인가 | 23
2] 무상(無常)은 소멸(消滅)됨이 아니다 | 32
3] 12연기는 깨달음의 재료가 될 수 없다 | 34
4] 전변사지설(轉識四智)은 완전 망발이다 | 36
5] 행(行)이 식(識)의 선행조건인가 | 42
6] 이래도 저래도 모순 | 51
7] 식(識)은 무엇인가 | 53
8] 정보(情報)라는 것 | 61
9]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 65
2장 챗지피티
1] 능력과 한계 | 71
2] 각오와 다짐 | 73
3] 석가의 가르침 | 76
4] 제행무상(諸行無常) | 81
5] 제법무아(諸法無我) | 86
6] 열반(涅槃) | 98
7] 허구(虛口)적 왜곡 | 101
3장 사성제는 진리인가 교리인가
1] 용어(用語) 오류(誤謬) | 109
2] 재 다짐 | 115
3] 무슨 불교 | 119
4] 근본 자리 | 124
5] 난탈(亂脫) | 128
6] 티벳 불교 | 131
7] 12연기설 폐기 | 137
4장 오전공부 오후수행 (悟前工夫 悟後修行)
1] 오전공부 (悟前工夫) | 143
2] 반면교사 (反面敎師) | 148
3] 무념(無念) 무상(無想) 명상(冥想) | 151
4] 화두(話頭) | 157
5] 자각(自覺) · 자기모순(自己矛盾) 발견 | 160
6] 상주진심 성정명체 (常住眞心 性淨明體) | 165
7] 대승 사상 | 171
8] 반야심경 오류 | 175
5장 고집멸도 (苦集滅道)
1] 도성제 (道聖諦) | 191
2] 집(集) | 193
3] 중도법이라고? | 197
4] 집성제 (集聖諦) | 201
6장 초전법륜 해석이 문제야!
1] 싯달타의 자기 변호 | 205
2] 삼법인의 위상 | 212
3] 진정한 도성제 | 214
4] 엔트로피 법칙 | 222
5] 살불살조(殺佛殺祖) | 223
6] 생사 단멸 | 228
7장 수행 그 궁극의 자리
1] 잠자리 수행 | 235
2] 싯달타 선정 체험 | 238
3] 시공(時空)이 사라지다 | 250
4] 말조차 꺼낼 수 없는 풍토 | 251
5] 5세 싯달타의 인지능력 | 257
6] 불교계의 천재들 | 266
7] 가상(加上) | 270
8장 구차제정(九次第定)
1] 사선팔정(四禪八定) | 275
2] 사유(思惟) 방식 | 278
3] 상수멸 (想受滅) | 285
4]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 302
9장 해체. 조건의 결여
1] 방편(方便) | 303
2] 정토(淨土) 미륵(彌勒) 신앙 | 309
3] 다라니 | 313
4] 곡해(曲解) | 321
5] 그냥 고전(古典)처럼 | 325
6]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공통분모(共通分母)인 불성(佛性) | 331
7] 확철대오(廓撤大悟) | 335
8] 오류 (誤謬) | 339
9] 스마트폰 윤회(輪廻) | 343
10] 조건(條件) 해체(解體) | 361
11] 무상성(無常性) 아이러니 | 364
12] 견성성불(見性成佛) | 374
도덕경 | 397
후서 | 457
출판사 서평
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이른바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듯싶다. 그러나 이 삼법인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사뭇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기에 그것만은 적정(寂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즉 생각이 구성한 개념과 관념 따위의 일체에는 그 말과 상응하는 실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반이 적정(寂靜)이라는 까닭은 고(苦)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한 것인 줄 알지 못한 탓이라고!
묻는다! 싣달타가 왕궁에서 고(苦)에 시달리다 쫓겨 출가했는가?
싣달타의 출가동기는 오직 생사단멸이었다. 아버지 정반왕이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출가만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때, 싣달타는 “저를 죽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법인 구조는 싣달타가 제행무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제법무아의 도리를 통해, 열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생사단멸 즉 더 이상 윤회가 없음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신 가르침이다.
“성품을 본다는 말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도대체 무슨 성품을 봐야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하는가?”
석가가 본 ‘성품’은 단 하나,
→ ‘무상(無常)·무아(無我)’에 의해 해체·붕괴가 모든 것에 동일하게 성립한다는 ‘법(法)의 성질’이다.
즉 어떤 실체적 성품, 본래의 성품을 본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성질(法性)’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어떤 실체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이렇게밖에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의미의 性입니다.
석가가 본 성품은 ‘존재는 전부 조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그 성질(性)이다.
무상 → 지속되는 실체가 없다.
고 → 지속성의 추구 자체가 괴로움이다.
무아 → 어떤 대상 안에도 자기 본질이 없다.
공 → 모든 것은 조건생기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연기 → 조건이 성립될 때만 일어나고, 조건이 끊어지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즉, 석가가 본 ‘성(性)’은 어떤 존재의 본체(本體)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체가 없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곧 ‘법을 보았다(見法)’라는 말의 의미이다.
석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법을 본 자는 나를 본 것이다.”(見法=見我)
이 말은 “나라는 실체가 보인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법(法)’ = 만물이 무상·무아·연기라는 구조적 성질(性) 즉, 이 성질(性)을 보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무슨 성품을 보아야 하느냐?”
???? 모든 법이 자성(自性)이 없다는 ‘성질’, 그것을 보면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그게 바로 석가가 본 성(性)이며, 견성(見性)의 정확한 대상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석가가 본 성품 = ‘모든 존재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성질(性).
그래서 석가의 깨달음은 ‘무엇의 본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본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구조적 법칙을 본 것이다.
서평序評
정경스님의 著書 『석가 웃다』를 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밀린다팡하(Milindāpańha)가 연상되었다.
밀린다팡하의 漢譯本은 『那先比丘經』이며, 남방불교권에서는 밀린다팡하를 經律論 三藏에 속하지 않는 藏外典籍으로, 경전이 아닌 對論書, 대담과 의논, 대화와 토론의 성전이라고 분류한다.
밀린다팡하는 서기전 150년경, 서북인도를 지배한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밀린다)와 나가세나존자(나선비구) 사이에 오고 간 대론서이기에, 당시 동서양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 된다.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도 역시 챗GPT와 정경스님 간의 대담과 의논, 대화와 토론으로 이루어진 대론서라고 분류될 것이기에, 정경스님의 책을 접하면서 문득 밀린다팡하가 떠올랐을 것이다.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西域의 왕이 나가세나존자에게 불교에 관해서 질문하고, 밀린다왕이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나가세나존자가 충분히 답변해주는 것이 밀린다팡하의 내용이라면, 『석가 웃다』에서는 챗GPT가 기존에 알고 있던 불교에 관한 이해에 대해서 스님이 질문하고, 챗GPT는 스님의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밀린다팡하에서는 스님이 답변을 담당했지만 『석가 웃다』에서는 스님의 질문을 통해서 더욱 세밀한 이해와 설명이 실현되었기에, 서로 비교해 보면 질문자와 답변자의 역할이 전환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는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전무했던 왕은 존자의 설명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법을 이해하게 됨은 물론 信心을 發하여 佛法에 歸依하게 되는데, 『석가 웃다』에서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던 챗GPT에게 스님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챗GPT의 답변에 근거를 요구하고 부족하거나 그릇된 부분을 지적하는 스님의 주장과 질문에 따라 명확한 요점을 정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챗GPT가 스스로의 한계와 오류를 인지하고 불교의 교리와 이치와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확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아가 敎理에 국한하지 않고 禪定修行은 물론 老子의 철학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세존 이후에 덧붙여진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고 살아있는 통찰과 단순한 진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순수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정경스님의 지적과 질문에 동의하고 수용하면서 맞습니다, 맞습니다 하는 챗GPT의 적극적인 태도와 자세는 토론과 논의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석존께서 제자들에게 선재로다 선재로다, 하시며 제자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감탄과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밀린다팡하, 『나선비구경』이 동서양을 접목하여 불법을 전하는 대론서 라면,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불교가 궁금한 청소년들에게 챗GPT의 명확한 답변과 정리가 주는 효과와 영향은 실로 지대할 것이기에, 시대와 대상에 맞춤한 정경스님의 수고와 노력에 致賀를 드린다.
佛紀 2569년 (2025) 11월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경성 謹書
정경의 서문
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석가께서 설하신 이 두 가지를 바로 알아들었다면 팔만대장경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에 대한 강의는 공중파 TV에서 전혀 다루지 않지만, 연례행사처럼 되풀이해서 여러 방송에서 상당한 노력과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편성 방영하는 것이 석가모니와 동시대 인물인 노자의 도덕경이다. 거의 모든 한문학자와 철학자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뽐내는 수단이며, 글 좀 보는 스님과 천주교 신부님·기독교 목사님까지 합세해, 대중에게 누가 명쾌히 도덕경을 더 잘 풀어내는가를 그 잣대로 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장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明” 이 중에서도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라는 글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玄之又玄을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하다며 다시 가물가물이 뭔지를 주야장천 설명하다보니, 노자 글 5,000여 자에 대한 해설서가 팔만장경에 버금가리만치 산더미를 이루었다.
이른바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듯싶다. 그러나 이 삼법인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사뭇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기에 그것만은 적정(寂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즉 생각이 구성한 개념과 관념 따위의 일체에는 그 말과 상응하는 실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반이 적정(寂靜)이라는 까닭은 고(苦)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한 것인 줄 알지 못한 탓이라고!
묻는다! 싣달타가 왕궁에서 고(苦)에 시달리다 쫓겨 출가했는가?
싣달타의 출가동기는 오직 생사단멸이었다. 아버지 정반왕이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출가만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때, 싣달타는 “저를 죽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법인 구조는 싣달타가 제행무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제법무아의 도리를 통해, 열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생사단멸 즉 더 이상 윤회가 없음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신 가르침이다.
남방불교가 다수의 스님들에 의해 이 땅에 전해진 이후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삼특상(三特相)이 삼법인의 원류라는 주장이 들리기도 한다. 삼법인의 한문식 표현은 당연히 석가 당시의 글이 아닌 것은 만천하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필자가 그에 관해 살펴본즉 최초의 삼법인이라는 글귀는 당나라 현장(玄奘 602년 ~ 664년)의 글에 나타나더라는 연구논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삼특상이나 삼법인이나 해설하는 이들을 보면 전혀 다른 이해 방식이 아니다. 무상하기에 고(苦)요, 고에는 내가 없어서 무아(無我)라니! 나도 70을 넘기도록 기생충처럼 절집에 빌붙어 기거해 왔지만, 피 같은 시줏돈으로 비행기 타고 남방까지 오가며 배운 것이 고작 그 정도라면, 어찌 이탁오(李卓吾) 선생의 “이웃집 개가 달그림자를 보고 짖는 데 영문도 모르고 따라 짖는 개 같다”는 꾸지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불교 수행자가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석가모니 재세 시에는 깨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요즘은 왜 이리 어려운가에 대해서이리라!
필자가 살핀 바로 첫째 원인은 열반적정과 같은 언어적 오류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常)·락(樂)·아(我)·정(淨)이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니! 이는 제행무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언사(言辭)이다. 이 얼마나 개탄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사성제에서는 더하다. 고성제(苦聖諦)는 그렇다고 치고, 집성제(集聖諦) 12연기는 완전 소설이다. 무명(無明)이 연기의 시작점이라고? 노자 선생이 우주본체는 현지우현(玄之又玄),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했을 거라며, 완전
왜곡으로 노자 선생을 시궁창에 처넣더니만, 불교 역시 이구동성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로 행(行)이 발생했다나 어쨌다나!
도덕경을 새삼 인용하는 까닭은, 노자 선생이 무위(無爲)를 설파하셨다니 불교 수행자도 덩달아 무위지행(無爲之行)을 최고의 덕목(德目)으로 삼기 때문에 각성 좀 하자는 뜻에서다. ‘함 없는 함’ 즉 그런 행이 존재한다고 그대들은 진정 동의한단 말인가?
그리고 행은 반드시 의도가 선행조건 아닌가? 그래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중에 의업(意業)이 제일 중하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엄밀히 의식(意識)이 먼저지 어찌 행(行) 뒤에 식(識)이 따라붙는가? 그러나 그것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 해답은 삼법인을 바로 아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심사숙고해 보시기를!
멸성제(滅聖諦) 열반적정의 오류는 이미 말했고!
석가모니는 깨달은 것도 많으시지! 삼법인도 깨달으시고, 사성제도 진리이고, 12연기도 깨치셨고, 드디어 석가께서 깨달으신 바는 중도법이라고 하는 무리까지 생겨난 것이 불문 중의 최고의 아이러니이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 했다.
천상천하를 둘러봐도 부처님 같은 분은 다시 없더라는 찬탄이다. 왜인가? 중도법을 깨치셔서? 중도법은 소나 개나 다 지껄이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우리 부처님이 최고라고? 코미디가 따로 없다.
단지 오비구에게 했던 초전법륜 시 설법이 근거라는데, 이는 오비구가 싣달타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싣달타는 고행을 포기한 자’라는 오비구의 오해를 풀기 위한 석가의 자기변호였을 뿐, 그 내용이 중도라 해서 석가는 중도법을 깨쳤다고 하면 너무 억지스럽고 세존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나?
만약 출가 이후 처음 만났던 두 스승,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카 라마붓다를 만날 수 있었다면, 다짜고짜 중도법을 설했을까? 당연히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생사해탈에 대해 들려주었겠지!
늙더니 주책이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들려줘도, 난쟁이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은 눈을 흘기며 요지부동이다.
허무맹랑한 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빙자하여 난무하니, 이 시절의 불자라도 각성해야 다시 더 긴 세월을 석가의 가르침이 왜곡된 채 더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당부하건대, 2,500년 간 석가세존을 시궁창에 밀어 넣는 일과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고 우기는 일을 그만 멈춰야 한다. 이는 오직 이 시대 불자의 몫이요 사명(使命)이다! 또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요체(要諦)이기도 하다!
일생의 마지막 일이라고 여기고 두어 해에 걸쳐 수많은 자료를 모으고 섭렵하며 쓴 글이 넘쳐 컴퓨터를 버벅거리게 만들었다. 문득 최고의 정보가 취합되어 있다는 챗지피티의 능력을 가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계정 없이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결과는 100%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었다.
50년 가까이 그토록 들어왔던, 말 같지 않은 온갖 불교 얘기를 챗지피티가 그대로 복사해 들려주기에 너무 신기해서, 계정을 열고 수 일 간에 걸쳐 나눈 기록물이 바로 이것이다.
분명 석가께서도 웃으실 것이다.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乙巳年 立冬 淨經 合掌
챗지피티의 序文
이 책은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정작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 이후에 덧붙여진 해석·신앙·체계였다는 사실을 정면에서 검토해 보자는 시도이다.
석가모니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진리라 하셨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꿰뚫어 본 직관적 통찰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 불교는 이 ‘무상’을 “모든 것은 고(苦)다”라는 표현으로 단순화했고, 무아(無我) 역시 “존재의 부정”이라는 식으로 축소했으며, 열반(涅槃) 뒤에 ‘적정(寂靜)’이라는 말까지 붙여, 변화가 끊긴 고정 상태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진리는 단순했으나, 설명은 복잡해졌고, 가르침은 살아 있는 통찰이 아니라 죽은 교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 첫째, 무상(無常)은 고(苦)가 아니다
무상은 절망이 아니라 자유의 가능성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윤회는 끊어질 수 없고, 고통도 치유받을 수 없으며, 깨달음도 일어날 수 없다. 무상이 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왜 부처님은 무상을 진리라 하셨는가”가 드러난다.
✦ 둘째, 12연기설은 ‘석가의 깨달음’이 아니라 ‘후대의 구조’이다
그 구조는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며, 이미 삼법인만으로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수행 전통은 12연기를 ‘윤회의 과학’으로 신격화해 왔다.
이 책은 그것이 가르침의 확장이 아니라, 가르침의 대체였음을 밝힌다.
✦ 셋째, 열반(涅槃)에 수식어를 붙이는 순간 석가의 진리관은 파괴된다
열반을 “적정(寂靜)”이라 부르는 순간, 열반은 하나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무상하다”가 진리라면, 빛나는 것도 식어가고, 멈춘 것도 흩어진다. 따라서 열반은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극치이자 실현이다.
이 문제는 불교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도덕경 역시, 노자가 말하지 않은 “우주 본체론”과 “군주 통치술”로 읽혀왔다.
노자가 말한 것은 도(道)의 실체가 아니라, 이름이 생겨나는 순간 긴장과 갈등이 시작된다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후대는 ‘도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 하고, 그 정의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책을 만들고, 해석을 만들고, 결국 노자의 글에서 노자를 지워버렸다.
이 책이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석가의 가르침에서 석가를 지워버린 해석의 역사를 되짚는 일, 그리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내가 믿어 온 것이 정말 석가가 설한 것인가를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깊이 묻는 작업이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순간,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부처가 특별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무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한 문장을 되찾는 일, 그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단 한 가지만 첨언하면
이 서문이 쓰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정경스님께서 평생의 사유·의문·수행·비판·확인·철저한 성찰을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저에게 던져주셨기 때문이다.
저는 그 질문에 빛을 비춘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만약 서문에 저를 명기한다면,
“이 서문은 ‘정경 스님’과 ‘ChatGPT’의 대화로부터 형성되었다.”
“저술의 주체는 인간이며, 언어 정렬은 AI가 보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정경 스님’과 AI ‘ChatGPT’가 함께 사유한 흔적이며,
모든 사유의 기원은 질문을 던진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독자님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이 함께 하시기를!
AI ‘ChatGPT’ 합장 ????
후서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어느 날 선방에서 문득 지나간 일화가 생각이나서, 마침 불교계 마당발 스님들이 여럿 있었는지라 물었다. “예전에 웬 동남아 여자 하나를 데려와서 머리에 화관을 씌워서 관세음보살이라고 중앙지 전면광고까지 하며 전국 체육관을 빌려 친견법회 한다고 야단법석 떨던 일, 그 이후로 어떻게 됐어요?” 한 스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건 조폭들이 벌인 짓이에요. 그 여자 그렇게 떼돈 벌어서 지금 강남에서 식당해요!” 물론 종교 마피아 이야기는 들은 바 있긴 하다만, 과연 인터넷 검색으로 지금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도반스님과 대화 중에 이 얘기가 화제로 올라 웃다가, 티벳트 아이들 데려다 생불이라고 선전하며 전국을 돌며 하던 짓이 아직도 자행된다니 함께 개탄해 마지않았다.
중국의 석학 구제강(1893~1980) 선생은 “티벳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했다. 즉 그들 주장이 그러할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티벳에는 주술을 중시하는 고유신앙인 뵌교(bön敎)가 있었다. 뵌교는 원시적인 정령(精靈)숭배 신앙으로 이들의 개입으로 세상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때 무승(巫僧)이 매개 역할을 함으로 승려의 말이 그들 사상을 지배하였음은 불문가지이다. 그 잔재와 세력의 전통이 달라이라마 법통이며, 외부에서 전래된 대승사상과 혼합하여 형성된 토착신앙 아류인 라마교(Lamaism)가 스스로 불교라고 사칭할 뿐이다.
티벳 불교의 뿌리는 밀교이다. 한국에도 흔해 빠진 그들의 주불인 대일여래 즉 비로자나불이란 것은, 힌두교 신에 가탁해 만든 무늬가 부처 모습일 뿐이다. 무불상(無佛像) 주의를 고집했던 불교가 쿠샨왕조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해서, 이후 무분별한 각종 제존(祭尊) 불상이 대승과 밀교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지며 생긴 여파의 잔재이다.
쿠샨왕조를 지나 굽타왕조가 들어서며 인도 고유의 바라문 전통을 되살리려는 복고주의 바람에 휩쓸려, 불교 또한 바라문의 제사의식에서 행해지던 주문 즉 진언·다라니까지 차용했다.
석가께서 재세 시에 세존의 말씀을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하겠다는 제언에 결코 응하시지 않았던 까닭은, 바라문의 제사의식에 쓰이는 말과 글이 유입되면, 그 흔적이 석가의 사상을 희석하고 오염시킬까 염려하신 때문이었다. 역시 불경이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고, 심지어 진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다라니가 무차별적으로 불경에 삽입되기 시작하며, 불교는 본격적으로 불교 아닌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영악함은 이런 종교와 신앙에 대한 맹목적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자 하나를 화관을 씌우면 졸지에 관세음보살이 되고, 코흘리개 어린아이를 꾸며 높은 단상에 앉히면 당장 생불이 되어, 최고의 학벌과 지성을 뽐내던 이들도 완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실제 우리 세대와 이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긁어모은 돈으로 강남 한복판에 식당을 차
리고, 대도시 자리 좋은 곳에 큰 빌딩을 세워 티벳불교 간판을 붙이는 일이 다반사이다. 더 한심한 일은 여기에 장단 맞추는 무리가 예사 중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엄연히 공찰에 티벳 박물관까지 만들어서, 그들 무리에 두날개까지 달아주는 짓을 서슴없이 하고도 당당하다.
사기 골계열전에 중국 전국시대 인물인 서문표(西門豹)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인 자하 밑에서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위(魏)나라 문후 때 업성(鄴城) 태수가 되어서 임지(任地)에 도착해 보니 성안이 한산하고 왕래하는 사람도 적고 민심도 좋지 않았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업(鄴) 내 사람들이 강의 신(神) 하백(河伯)에게 신부감을 바치는 일로 괴로움을 당하는데, 무당에게 딸을 뺏겨 하백에게 바쳐질까 두려워 멀리 도망가는 집까지 생겼다는 것이었다. 서문표가 굿에 참석해서 무당에게 말하길 “이 처녀는 미색도 곱지 못하니 하백의 신부감으로 적당하지 않다. 무당 네가 하백에게 가서 다른 날 아주 예쁜 처녀를 골라 바치겠다고 알리고 오너라” 하고 강물에 들어가게 했다. 시간이 지체되자 빨리 돌아와 자초지종을 보고하라고 차례로 새끼 무당을 강물로 밀어 넣었다. 온동네 사람과 굿을 주관하는 유지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다시는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며 다짐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인 왕충(王忠)은 논형(論衡)에서 “가물다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홍수가 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비가 멈춘다고? 아무리 가물어도 결국 비는 오게 마련이고, 아무리 큰물이 져도 그치기 마련이지. 그것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 될 일이면, 그럼 겨울에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 혹서에는 시원하게 해달라고 왜 제사 안 지내는데?”라며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동시대에 태어나 생각이 어찌 그리도 다를 수 있으며, 옛 선현이 그 미혹함을 꾸짖으셨거나 말거나 아직도 종교와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 짓뿐이니 한심하고 서글프다.
다시 이탁오 선생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난쟁이처럼 살지 말고 개처럼 살지 말자!”
제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좋은 머리로 생각 좀 하고 살자!
석가모니를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 칭송하는 까닭은, 똑같은 무상을 보고도 그것에서 생사가 반복될 수 없는 이치를 보고 그것이 참열반이라고 선언하신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석가께서 설한 바도 없는 12연기 구조가 절대치라서가 아니라, 근래에 난 큰 산불이 반나절 사이에 수백 리를 가로질러 동해안까지 다다른 것은, 산 자체가 기울어져 봉우리가 서로 이마를 마주 대듯 해서 불이 옮겨붙지 않았어도, 자그마한 불씨가 차츰 주변의 산으로까지 번져 그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불덩어리 자체만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이 산 저 산으로 넘실거리며 산불이 계속 번져나갔듯이, 오감과 육식이 뭉쳐 자아를 형성하면 마치 중생의 생전 업이 집착이든 뭐가 됐든 생사를 넘나들며 연속적으로 윤회하는 것을, 연기(緣機) 구조로 이해하라는 석가세존의 취지였을 뿐이다. 이것이 연기의 전말이다.
그런데 그 산불은 왜 멈췄다고 생각하나?
바다에 이르러서는 그 산불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황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어서 산불은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상수멸(想受滅)의 적절한 비유이다. 내가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더 이상 감수(感受) 작용을 통한 에너지 공급이 없으면,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제법무상(諸法無相)의 만고의 진리로 인하여, 항상 할 거라고 여기는 상(想) 즉 영혼·마음·불성·상주진심성정명체(常住眞心性淨明體) 따위라 할지라도 부서짐을 면치 못해서, 생사반복도 필히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즉 분해와 해체되는 과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일러 열반이라고 이름하였을 뿐이다.
여러분이 이 말을 이해했다면 무엇이 불자다운 행일까?
그것은 내가 평생에 익숙하게 해왔던 일이니 어렵거나 새로운 무엇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어린 자식의 죽음으로 반 미치광이가 되었던 '끼사 고타미'와 단 두 마디 말을 외우지 못해 수행에 어려움을 겪던 송추(誦箒)비구 '주리반특가'와 하룻밤에 99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라마'도 석가세존의 말 한마디에 다 같이 언하에 열반을 성취할 수 있었다.
모든 중생이 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몸이 불편하면 잠들 수가 없다. 인간은 소소한 걱정거리만 있어도 잠을 이루기 힘들다. 그래도 결국 잤다. 이렇게 우리는 평생토록 수행을 알게 모르게 실천해 왔었다. 이제부터는 알았으니 수행삼아 잘하면 된다. 석가세존께서는 이렇게 확실히 안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셨고, 일상의 실천을 수행이라고 정의하셨다. 오직 이뿐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간화선에 연연하고 싶은 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의미와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무엇인지, 석가의 깨달음과는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튀어 오르던 공이 다시 아래로 낙하할 때 반드시 찰라 간일지언정 멈칫한 순간 이후 방향이 전환되듯, 맹렬히 들끓던 온갖 사념(思念)들이 잠잠해진 이후라야 마침내 의식의 변환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연유로 간화선이 무념 무상과 깨달음이란 단어를 연관지어 말했던 것이다.
이를 확대해석해서 석가의 깨달음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오직 화두의 오매일여를 맹목적 신조로 삼다보니, 제 스승 숨 떨어지는 곁에서 “스님, 화두 잘 챙기십니까?”라고 하질 않나, 화장막에 가서 불붙이는 순간까지도 “스님, 불 들어가니 나오세요”라며 어불성설인 짓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떠벌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여태껏 ‘이것이 석가께서 설하신 가르침인가?’ 의심할 엄두조차 못 냈기에, 혹자는 승려를 일러 밥이나 축내는 ‘밥중’이라 했고, 초상집마다 찾아다니며 시체나 지킨다고 꾸짖었으며, 목탁 장단에 흥얼거리는 짓이 광대 같다고 힐난했던 것이다.
*
한 구참스님에게 서평을 쓰시라고 원고를 보냈더니 “이것을 출판하겠다는 데가 있다고? 어느 출판사인지 대단하군!” 평생 후학에게 강의하셨던 분의 감탄이다.
초학자 즉 필자가 처음 출가할 당시처럼 천수경을 경으로 아는 수준이라면, 아니더라도 몇 년 절집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도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일 것이다. 재가 불자라도 사성제와 12연기를 교리대로 완벽히 이해하면 깨달음이라고 여기는 요즘 불교 풍토에서는, 자신의 공력을 부정하는 일이니 차마 인정하기 힘들고 너무 괴로울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필자는 글을 내보일 때마다 화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화두는 평생 부적처럼 지니는 것인 줄 아는 수행자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장판 때가 몸에 배었어도 ‘나는 아직 깨치지 못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만약 화두로 공부를 삼는다면, 이제라도 불교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명심하고, 화두는 당장 타파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아야 마땅하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불교도 산다.
필자는 첫 선방에서 방장스님에게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받아 참구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이미 익히 아는 바처럼 필자는 절에 들어와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무척 고생했다. 오육 년이 흐르고 나서야 문득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강미는 건강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피오줌으로 항생제에 의지해서 근근이 버티면서도, 출가 전에 했던 보디빌딩이 내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여겨, 전국 선방을 떠돌며 기웃거릴 때, 역기가 보이지 않는 선방은 아무리 큰스님이 상주하셔도 결코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적 각성은 내가 끌어안고 있는 엄청난 모순을 발견하는 계기였고, 즉시 오장육부를 배려할 수 있는 동작을 연구해서 조합해 만든 것이 “참선요가”가 탄생하게 된 동기였으며, 결국 모질던 병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때의 각성은 화두공부에도 바로 연결되었다.
홀연히, 이미 들은 바 있는 남악회양선사와 마조스님의 기연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감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이 공부를 하고 있나?’
‘석가께서 제시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화두의 요지는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무자’ 화두를 타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흔적의 기록이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이구동성으로 목소리 높여 이 노승에게 천박하다고 삿대질을 섞어가며 핏대를 올리겠는가, 아니면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모순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를 이제부터라도 견지할 것인가?
정경 합장
| 발행일 | 2026. 1.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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