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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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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6869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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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A5
윤창화/민족사


책소개




 


이 책은 ‘선의 원류’, ‘선불교의 모든 것’을 탐구한 책이다. 선종(禪宗)의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중국 당송시대 선종사원(선원 총림)의 생활과 철학, 문화, 각종 소임과 제도와 조직, 직제, 가람 구성, 법어의 종류와 형식, 선문답의 기능과 방식, 좌선, 선원의 벌칙, 선승의 입적과 장송 의식 및 소지품 경매, 선원의 차 문화, 선종사원의 정원, 선시와 선화의 기준, 공안, 화두 등 선원총림의 생활문화 전반을 탐구하였다.
『선불교』는 2017년에 민족사 학술총서의 하나로 출판된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을 부분적으로 보완하여 대중적인 책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을 리메이크하여 출판하게 된 데에는 출판 분야에 있는 지인이 저자에게 보낸 한 통의 메일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번 보내주신 책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을 너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 진한 감동의 여운이 남아 몇 자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불교, 더 깊게는 선불교의 원류(한국불교를 포함한)를 찾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생활·철학·문화로 본 선불교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학술 서적으로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 불자들뿐만이 아니라 스님들도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선불교의 태동과 지금의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첫째, ‘학술 서적’의 범주에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학술 서적’ 하면 특정 범위의 사람들만 보는 어려운 책으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둘째, ‘당송시대’로 국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목에서부터 ‘당송시대’로 국한하면 내용에서 전하고 하는 본뜻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선불교가 당송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하지만 그 흐름이 지금 한국불교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메일을 받은 후 저자이자 민족사 윤창화 대표는 두근거리는 마음과 황금시대 선불교가 선에 관해 탐구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출간하게 되었다.

 


◉ 선종사원은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작불학교(作佛學校)
중국 중세(당송시대) 선종사원(선원 총림)은 현세 이익이나 사후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종교적·기복적 장소가 아니고,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문적인 수도장이었다. 선원 총림은 미혹한 중생을 부처[佛]로 만들고, 범부를 위대한 조사(祖師)로 만드는 성불작조(成佛作祖)의 공동체였다. 각종 제도, 생활철학, 그리고 가람 구조와 납자 지도 및 교육 시스템은 중생을 전인적 인격자, 깨달은 부처(佛)와 조사(祖師)로 만드는 성불작조에 맞추어져 있었다.

 


◉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선불교의 4가지 시스템
선종사원의 납자 교육 및 지도 시스템의 목적은 ‘미혹한 중생을 깨달은 부처’로 만드는 데 있었다. 그 시스템은 법문(法門)과 독참(獨參, 개별적인 지도), 청익(請益, 보충 교육), 좌선(坐禪) 이렇게 네 가지였다.
상당 법어 등 법문은 깨달음, 반야지혜를 이루게 하는 차원 높은 작불대학(作佛大學)의 선 강의이고, 독참은 방장과 납자가 1:1의 독대를 통한 개별적인 지도이다. 청익은 보충 교육이며, 좌선은 번뇌를 쉬게 하는 시간이다. 당송시대 선원에서는 상당법어는 5일에 1회(한달에 6회) 있었고, 매일 법문으로 아침 법문인 조참(朝參, 아침 8시경)과 저녁 법문인 만참(晩參)이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20회 이상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독참은 5일에 1회가 의무적이었다.

오늘날 한국 선원은 이 4가지 시스템 가운데 좌선만 남아 있고, 독참, 청익 시스템이 결여되어 있다. 상당법어 등 법문도 결제·해제 때만, 그것도 조실이나 방장이 있는 곳에만 이루어지고 있다. 적어도 상당법문은 15일에는 1회는 있어야 하고, 독참을 복원시켜야 하며, 임제록 등 중요한 선어록 몇 가지는 제창(提唱)해야 한다. 반면 지나치게 ‘좌선 지상주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거의 10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데 당송시대에는 많아야 하루 5시간이었다. 이렇게 좌선 지상주의가 된 것은 남송 후기-원대이며 우리나라 선원은 이 시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 달마의 발낭 속의 선(禪),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그 속의 선을 내놓으라는 뜻
서기 510년(양무제 1년) 보리달마(?~528)가 중국 남부 해안 도시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그의 발낭(鉢囊, 바랑) 속에는 선(禪)이 들어 있었다.
선불교의 대표적 공안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바로 ‘그 발낭 속의 선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이는 곧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말로, 참선 수행자들의 영원한 탐구 주제, 과제가 되었다.

벽안의 보리달마로부터 첫발을 내디딘 선불교가 의젓한 하나의 교단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는 것은 그로부터(달마 중국) 약 140년 후인 사조도신(四祖道信, 580~651)과 오조홍인(五祖弘忍, 602~675)의 동산 교단 때부터다. 이어 낙양과 장안의 대법주(大法主)인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의 눈부신 활약으로 선불교는 정치와 종교의 중앙 무대인 장안과 낙양까지 진출한다.

 


◉ 선종은 ‘더부살이, 셋방살이 신세’
그러나 신흥불교인 선종은 아직 당(唐) 초기 중국의 8대 불교 종파의 대열에는 끼지 못했다. 선종은 화엄종・천태종・율종 등에 비하여 토착화 과정이 얼마 되지 않았고, 교단의 기반도 일천하여 그 세력은 계절풍·지역풍을 벗어나지 못했다. 몇 곳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독립적인 수행 공간, 독자적인 선종사원이 없는 무주택 상태였다. 선승들은 대부분 율종 사원에서 건물 하나를 빌려서 생활하는 이른바 ‘더부살이 신세’, ‘셋방살이 신세’ 또는 혼자 암자에서 독거(獨居)하는 ‘독살이 신세’였다.

 


◉ 선종의 독립운동 전개
그러나 율종과 선불교는 목적과 지향하는 바, 그리고 수행 방법과 생활방식 등에서 적지 않은 괴리가 있었다. 율종은 불상과 경전을 신성시했고 율장을 강독·탐구하며, 계율을 준수·실천하는 것이 수행 방법이었다.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선불교는 불상이나 경전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대신 선은 ‘불립문자·교외별전, 즉 경전 외에 별도로 전한 진수로서, 곧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선은 율종을 비롯하여 여타 종파에서 중시하고 있는 불상과 경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깨달음의 첩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불상과 경전을 무시하기도 했다. 또 선불교는 직관적·비논리적이었다. 한 지붕 두 가족, 이질적인 두 종파의 동거였다.

선불교는 제도·법식·수행 방법 등에서 많은 애로점이 있었다. 그들은 선종에 맞는 각종 제도와 생활 방법 등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율종 사원에 의탁해 있는 입장으로서 율종 사원의 제도와 규칙과 법식 등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적으로 의존, 종속관계였고, 종속관계는 해탈, 속박에서 벗어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아니었다.
조사선의 완성자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78), 그리고 그 정통을 잇고 있는 제자 백장회해(百丈懷海) 시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한층 표면화되었다. 이제 선종의 독립, 율종 사원에서 독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등장했다. 이는 조사선의 완성과 더불어 선승들이 자주성과 주체의식이 강화된 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 선종 독립의 기치를 든 백장회해,
중국 최초의 선원총림은 백장산 백장사

선종의 독립, 그 역사적인 사명을 가슴에 안고 홀로 붉은 노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단소독보(丹霄獨步, 붉은 노을 속을 혼자 가다)의 노선승(老禪僧)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의 선승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이다.
그는 6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등 제자들과 함께 당차게 율종 사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웅산 백장사를 창건했다. 이것이 선불교 최초의 선종사원이다. 또 그는 생활철학으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어야 한다)을 강조했다. 직접 경작(耕作) 즉 노동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철학이었다. 동시에 그는 선종사원의 법전(法典)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했다. 세칭 그를 가리켜 ‘선종의 건설자’ 또는 ‘총림(선종 사원)의 문을 연 백장대지선사(叢林開闢 百丈大智禪師)’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송(宋)의 고승 찬녕(贊寧, 930~1001)은 『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 상권 「별 립선거(別立禪居)」(별도로 선원을 세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달마의 도(道)가 행해지자 기봉(機鋒, 禪機)이 서로 맞는 이들은 서로 그 도를 드날렸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기존 사찰(율종)의 제도를 따르면서 별원에서 생활했을 뿐, 별도의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사조도신 선사가 동림사에 주석했고, 육조혜능 선사가 광과사에서, 담선사(談禪師)가 백마사에 주석했으나 모두 다 한결같이 율종사원의 제도를 따랐을 뿐이다. 참선자 가운데 혹 어떤 이는 두타행으로 누더기를 입는 것으로써 다름을 삼았을 뿐이었다. 그 뒤에 백장선사가 새롭게 뜻을 세우고 큰 포부와 계획으로 별도로 선당을 세우고 좌선을 격려했다.”

송 초기의 한림학사 양억(楊億, 974~1020)도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 이렇게 상황을 전하고 있다.

“백장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종(선승들은)은 소실(달마)로부터 시작하여 조계혜능에 이르렀지만, 그때까지 선승들은 대부분 율종 사원에 거주하였다. 비록 별도로 당우(선원)가 있었지만 설법과 생활이 (선禪의) 법도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의 과제(독립)가 되었다.”

 


◉ 선불교가 율종 사원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
선불교가 율종 사원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율종의 수행 방법과 생활방식, 규칙, 그리고 설법 내용 등 여러 가지 제도가 선불교의 목적, 이상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종파가 더 옳다거나 부족하다고 말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율장을 탐구하는 율종과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과는 그 방법론이 달랐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수행 방법과 목적은 직지인심을 통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 범부를 조사로 만드는 성불작조(成佛作祖)에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기복적 역할을 도외시했다. 반면 율종은 율장(律藏) 탐구가 주된 공부 방법이었고 지계(持戒)가 곧 수행의 척도였다. 계율, 규범을 중시하는 율종과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선불교는 사상적인 괴리가 심했다. 선불교는 그들의 이상에 부합하는 독자적인 생활공간 즉 독립된 선찰(禪刹)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생활방식, 보청법
선불교가 율종 사원의 울타리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스스로 온실을 박차고 노천(露天)으로 뛰쳐나오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많은 대중이 함께 생활해야 하는 구조에서 의식주 문제 등 생활경제는 가장 큰 난제였다.
당시 중국불교의 사찰과 종파는 대부분 황실이나 권력자, 지방 절도사 등 경제력이 큰 재가불자 의존도가 높았다. 한 사찰을 유지·운영하자면 큰 후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장회해는 권력자들의 후원을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보청법(普請法, 노동·울력)을 제정했다. 수행자 모두가 직접적인 생산 노동, 즉 경작을 통하여 총림의 생활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자유인이란 예나 지금이나 관념 속의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보청법은 백장총림의 경제적 자립의 기반인 동시에 생활철학이었다. 백장 문하의 납자들이 도시 문화와는 거리가 먼 대웅산(백장산) 기슭에서 권문세가들의 손짓을 초개(草芥)로 여긴 채, 오로지 자기 본분사(本分事, 수행)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급자족의 보청법 때문이었다.
백장선사의 대표적 공안인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어떠한 속박도 초탈)’은 독탈무의(獨脫無依, 일체로부터 초월)한 절대 무위진인(無爲眞人, 깨달은 자유인)의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이 공안의 시대적·문화적 배경은 ‘선종의 독립’이라는 선종사적 슬로건 속에서 나온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필요 없다. 그리고 그 지리적 배경은 백장산 대웅봉(大雄峰)이다. 우뚝한 대웅봉은 곧 백장선사의 이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무종의 회창폐불과 선종의 비상(飛翔)
만당(晩唐) 초에 이르러 중국 불교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1~846)’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4만여 개의 사찰이 파괴·폐사되었고, 승려 26만 명이 강제적으로 환속 당했다. 불상과 동종(銅鐘) 등 철기(鐵器)는 모두 녹여서 주전(鑄錢) 등 기물을 만들었고 경전은 대부분 불에 타는 등 사찰과 승려 90%가 사라졌다.
회창폐불 사건은 당말 불교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엄청난 사건이었다. 천태·화엄·법상(유식)·율종·밀교 등 장안과 낙양을 기반으로 한 도시형 불교는 치명타를 받고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국가나 귀족, 권력자 등의 보호를 받고 있던 불교 종파는 멸절(滅絶) 상태에 이르렀다.

백장회해 입적(814년) 후 30여 년 만에 불어 닥친 이 사건은 중국불교의 지형도를 완전히 뒤틀어 놓았다. 그 와중에서도 비교적 타격을 적게 입은 것은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노동형 종교인 선종과 서민형 종교인 정토종뿐 이었다.
그 이유는 선종사원은 도시형·권력 지향형 종교(불교)가 아니고 서민형 종교였다. 선종사원은 대부분 도시와는 거리가 먼 산속에 있었고, 울력(보청), 직접 노동을 통하여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대중과 함께 호흡했던 불교, 그 가운데서도 강남지역의 선종은 피해가 가장 적었는데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 흥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지리적인 환경이 작용했다.

회창폐불의 소용돌이는 무종(武宗)의 급사(急死, 846)로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피해와 후유증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무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 846~859)은 즉위하자마자 폐불령을 철폐하고 불교, 특히 그중에서도 선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했다. 이것은 그가 무종의 미움을 받고 한때 승려가 되어 일신(一身)을 선종사원에 의탁했던 일과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된 선종은 그 누구보다도 선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한때 갈 곳 없어 목숨을 의지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말 오대(唐末五代, 850~959)는 선불교의 전성기였다. 당말에 일어난 황소의 난(875~884)은 당 왕조의 멸망을 재촉했다. 당말 오대의 정국은 지방 절도사들의 군웅할거 시대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선불교는 여전히 오가(五家)가 성립하는 등 흥성기였다. 이 시기 선종은 중국불교 및 종교계를 석권했다. 율종 사원으로부터 독립한 지 250여 년 만의 일이다. 회창폐불 사건은 선불교를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지금, 무엇 때문에
꼰대 시대인 당송시대 선원을 탐구했나?
지금 한국 선불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기준치는 ‘선의 원류’, ‘선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당송시대의 선이며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한국 선불교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짝퉁을 알려면 진짜를 알아야 하고 진짜를 모르고는 짝퉁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원류, 뿌리를 모르고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뿌리, 원류에 대한 고찰, 성찰과 반성을 통하여 원류로 복귀, 개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 한국 선의 문제점이 당송시대로 돌아가 깨끗하고 개악(改惡)이 없는 ‘한국 선의 황금시대’로 돌아갔으면 한다.

 

 



저자


윤창화

강원 평창 진부 출신으로 13년간 출가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한 2년 절에 가서 한문이라도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권유에 1965년 월정사로 입산, 만화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수계 후 8년 동안 노사(老師) 탄허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학문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1972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13회), 1978년 환속했다. 13년의 입산 생활은 고귀한 사상과 철학을 가득 싣고 달렸던 쌍두마차. 1980년 불교 전문 출판사인 민족사를 설립해 42년째 불교 책을 내고 있다. 1999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한국고전번역원)을 졸업했다. 속명(윤재승)을 쓰면 무언가 정체성을 상실한 느낌이 들어 서류 외에는 쓰지 않고, 수계명인 ‘창화’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논문으로 「해방 후 역경(譯經)의 성격과 의의」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한암사상』 3집, 2009) 「경허의 지음자 한암」(『한암사상』 4집, 2011)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불교평론』 36집, 2008)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불교평론』 52집, 2012) 등이 있고, 저서로는 『왕초보, 선(禪) 박사 되다』,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2017,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2017 불교평론 학술상)이 있다.

 


목차

 

머리글 | 중생을 부처로, 범부를 조사로 만들다

1장 | 한 송이 꽃이 천하를 뒤덮다
선종 사원, 총림의 독립

2장 | 부처와 조사를 만들다
선원총림의 목적과 철학

3장 | 조직이 없는 집단은 오래가지 못한다
선종 사원의 직제와 조직

4장 | 맡은 바 소임이 곧 수행
선원총림의 상위 소임과 중하위 소임

5장 | 불상 속에는 부처가 없다
불전의 쇠퇴와 법당의 등장

6장 | 주지는 법왕이고, 현신불
선종 사원의 방장(주지)

7장 | 선원총림의 오도 시스템과 납자 지도
법문・독참・청익・좌선

8장 | 한마디에 부처로 급제하다
선종 사원의 법어와 형식

9장 | 언하에 대오하다
법어의 종류와 성격

10장 | 깨달음을 이루는 기지의 대화
선문답의 방식과 기능

11장 | 깨달음으로 가는 직선로
고칙·공안·화두

12장 | 발낭과 석장을 풀다
선종 사원의 입방(방부) 방법

13장 | 90일의 결투
선원총림의 하안거와 동안거

14장 | 정처 없는 공의 여정
만행과 운수행각

15장 | 깨달음을 위한 가람 시스템
선종 사원의 가람 구성

16장 | 하루 네 번 좌선하라
좌선의 정례화와 횟수

17장 | 부처를 뽑다
수행승의 생활공간, 승당

18장 | 미래의 방장과 부처들
선원총림의 행자 교육

19장 | 조석으로 예불하라
선원총림의 조석예불

20장 | 문자에 빠지지 말라
선종 사원의 좌선과 간경

21장 | 공양은 식도락이 아니다
선종 사원의 발우공양

22장 | 가사와 발우를 빼앗고, 승복을 벗기다
선종 사원의 규율-벌칙과 추방

23장 | 공의 세계로 돌아가다
선승의 입적과 장송 의식

24장 | 차와 선은 하나이다
선종 사원의 차 문화

25장 | 지상의 유토피아
선종 사원의 정원

26장 | 문자와 비문자의 만남
선과 시의 세계

27장 | 선의 세계를 미술에 담다
선화와 선미술

28장 | 선원총림의 한 해가 가다
선원총림의 한 해 일정

참고문헌

추가 정보
발행일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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